강의: 김영규 목사 (개혁주의 성경연구소 소장 남포교회 협동목사)
일시: 1999.11.29.
장소: 강변교회 / 주관: 총회교육부
개혁주의 성경연구소에서 그리스도인 자녀에 대한 교육이념으로서 다음 몇 가지를 내세우고 있다.
1. 모든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2. 인성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에서 있어서 낙오자가 없어야 한다. 이는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그에 대한 더 큰 보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3. 창조력을 위해서 기초재능에 따라 모든 분야에 교육이 확대되어야 하고 언제든지 교육방식은 통합교육의 방식이어야 한다.
4. 첨단과학 및 그 기술일수록 가능한 한 빨리 개방되어야 하고 기초능력이 확인된다면 가능한 그에 대한 조기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5. 누구에게나 무제한적으로 그리고 평생을 통하여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6. 첨단기술과 좋은 문화는 모든 이들에게 공유하도록 할 때 발전된다. 거기에서 창출된 문화가 바로 우리의 문화이다.
상기의 교육이념의 특징은 교회생활과 일상생활을 분리해서는 안되고 예배와 일상생활을 구별하면 안되며 선교나 전도를 역시 일상생활과 분리하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문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일반사회나 교육환경에서 문화생활을 고취하고 문화를 경제수단으로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생활을 문화라고 하지만 인간존재의 궁극적 가치에 비해서 진정한 문화가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가치를 저하시키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예배의 성격을 없이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교육에 대해서 다룰 때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그 중심적 내용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첫째로 중생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난 일반 계시관이나 문화관도 어거스틴의 용어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나님이 친히 ...(인격체)를 통해서 ... (매일의 좋은 것)을 (하나님의) 정하심과 역시 물의 토대를 이루는 경륜적 부에 따라서(secundum institutionem tuam et divitias usque ad fundum rerum dispositas) 베풀어 주신 것이라는 구문으로 나타난다. 신칼빈주의의 문화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구문은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보편적 구문이다. 따라서 어떤 시대를 통해서든 이런 인간형이 변함없이 보존되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이런 하나님의 형상의 발전적 성격이 그런 형태로 나타나도?하는 것이 기독교적 경건과 거룩한 삶을 목표로 하고 있는 교육의 최소한의 방향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서 있는 것은 모든 죄인들이 벗어나야 할 인간적 목표와 방향으로 서 있는 것이다. 이런 역할이 상실할 때 교회는 진보적 사회에 필요 없는 것이 된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제시하는 인간형은 세상과 짝하고 더불어 흘러가는 존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로부터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귀의 역사나 부패된 사회가 기독교인들에게 빼앗고자 하는 것은 삶의 원리와 이상을 빼앗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마귀의 시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상에 달리시기까지 인류에게 보이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발전해야 할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를 빼앗기지 않으신 것을 보이신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원리가 그런 고귀한 원리의 한 예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그것을 빼앗기지 않아야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만 빼앗기면 우리가 저절로 사회로부터 의미가 없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주일학교 교육의 내용과 방법과 관련해서 성경의 가르침이나 기독교적 교육내용을 접근할 때 현대학문의 첨단적인 영역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넘어 극복하는 차원에서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져야 그 교육이 현대인간에게 공헌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은 그런 영역을 넘어서 높은 차원의 장을 열기에 충분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 최근 학문의 특징이 첨단적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은 서로 잘 만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이런 교육방식이 지금 의미를 얻고 있다. 이런 통합적인 영역은 여러 가지 면에서 관찰될 수 있다. 우리 연구소에서도 계속 대화로 초대되고 있는 그런 영역의 주제 중 하나로 예를 들어 시간의 창조와 무(無)에 대한 문제가 그것이다. 현대 물리학 쪽에서 물리학적 무(無)와 관찰자의 의식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물리학이나 철학이 만나는 가장 첨단적 영역이 있다. 같은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영역은 자유의지와 철학적 혹은 물리학적 결정론에 대한 영역이요 동시에 모든 학문들과 인간의 한계부분에 대한 영역이다. 따라서 이런 특별한 영역이 대화의 영역으로 등장하는 이상 신학적 물음이 되어 왔던 무로부터 창조와 하나님 예정론과 자유의지 인간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것이 그 영역과 관련해서 다른 현대과학과 함께 다루어져야 할 문제로 요청받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대화의 초대를 교회가 기꺼이 수용하여 극복하면서 기독교 진리의 가장 첨예한 영역을 창출해야 하고 성경이 갖는 범시대적이고 신적인 진리를 드러내야 한다. 아마 이런 대화의 과정에서 기독교적 진리는 더욱 더 가치가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로 교회의 윤리적 가치와 도덕적 수준은 이런 첨단영역에서 넘어서는 교육적 창출과정에서 어부지리로 얻는 방식이어야 한다. 학문과 윤리 교리와 생활이 이원론적으로 병행하는 교육시스템은 경제적으로나 인력 면에서나 너무나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종종 실패해 왔다.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구원의 모?원리에 대한 말씀의 계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윤리적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식이나 성경적 가르침에 대한 교육이든 그 교재이든 모든 계시가 갖는 전반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교재도 쓰여져야 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창조기사의 계시방식(명령)은 이미 인간과 신적 존재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성격이다. 동시에 창조계시의 내용이 빛을 포함한다면 우상숭배 금지의 범위도 그런 빛 아래 표상 될 수 있는 모든 내용도 섬기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게 된다. 더구나 그 창조에 시간의 창조까지 포함한다면 단순히 인간의 욕심을 우상으로 삼는 윤리적 가치보다 더 깊은 우상의 개념을 표상 할 수 있다. 더구나 계시의 진척에 따라 양심과 죄와 죽음의 문제 심리적 유혹과 공포 숨는 일 핑계 및 옷 등이 갖는 윤리적 의미들이 있다. 동시에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일반계시에 있어서 은혜의 보편적 차원에는 역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질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이런 모든 심화단계는 처음 우주의 빅뱅이론과 그 팽창이론이 갖는 한계를 대화의 내용으로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성격이나 적응계시의 은혜의 차원들이 벗겨지는 그런 명제들이 발굴되어야 되는 것이다.
이런 기본취지 아래서 성경본문에 대한 성경적 해석의 내용이 그것이 갖는 본래적 가치에 따라서 제학문들과 대화의 과정에서 높게 드러나는 대로 계속 발굴되어야 한다.
몇 가지를 예를 든다면
첫째로 계시에 대한 이해이다. 현대에서 계시에 대한 이해를 발견될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은혜의 차원이 계시라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내려오셔서 우리의 틀에 맞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적응계시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물리학의 한계로서 인간의 한계는 어거스틴이 다루었던 내용으로서 감정이나 지적행위의 기반을 이루는 인간의 모든 지향적 행위들은 지각에서 오는 구체적 직관이나 표상에 안식한다는 점이다. 그 안식에 들어가면 더 이상의 지향적 행위가 멈추거나 우회하며 다른 지향행위로 바꾸어진다는 사실이다. 그 부분이 인간의 한계이다. 우리의 피조성이란 그런 한계선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런 한계성을 강조하면서 계시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을 이루도록 시도해야 한다.
둘째로 인간의 근원과 관련해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근본적 뿌리로서 인간의 지향적 행위와 전적타락문제이다. 여기에 당연히 실천이나 행위우선주의에 대한 비판가능성과 함께 양심이나 이성에 대한 비판도 열려져 있다.
셋째로 우주의 한계와 시간문제 그리고 우주의 창조와 결정론 그리고 계시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의 본질적 내용들을 확립케 한다는 점이다.
상기의 세 가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논의들에서 대화의 장을 열 수 있다.
1) 자유의지는 물방울 내의 공간과 같은 스칼라 공간(scalar field)을 상상할 수 있다. 즉 중심점이 존재하되 중심에서 무한히 개방되어 있으면서 지향적 방향만 있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세포?그런 자아가 있다면 세포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창문이 없는 경우도 있고 안에서 밖을 보는 눈과 같은 창문이 있는 경우도 있으며 지렁이처럼 피부가 그 창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겠다. 그렇지만 큰 닫혀진 지향적 공간이 작은 닫혀진 지향적 공간을 포함하되 서로 창문을 통해서 교통이 있는 그런 통일체를 상상할 수 있다.
2) 미지의 수학적 결정론이다. 한 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맺어 떨어지는 경우와 같이 처음 정보를 주고 물질의 지향속도에 따라서 자라서 열매를 맺고 떨어지는 알지 못하는 아주 특별한 정보만 가진 경우이다. 그런 결정론은 마치 혼돈에서 질서가 생기는 것과 같은 자생적 프랙탈 그래픽에서 상상할 수 있다.
3) 인간의 모든 것들을 제 2 원인으로 사용할 때 즉 인간의 모든 지향적 행위들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경우 더 이상 자유의지가 없다. 마음과 그 마음의 지향적 행위들을 모두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체들 모두를 다스리신다면 더 이상 마음은 그 지배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자유의지만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아마 어렵게 이해되는 라이프니쯔의 창문이 없는 모나드 개념을 상기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의지 자체를 선물로서 자신의 독립성을 누리도록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야지 만물을 알도록 주어진 공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만 하나님이 주신 가장 값진 선물로서 가치화되어 있다.
4) 자율적 생명체에게 선물로 주어진 지향의 중심점은 지금까지 이해되는 수학적 중심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 점으로 표시될 수 없는 차원적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중심에 대한 것이다. 수학적 개념으로 표상이 되지 않는 현저한 예로서 남아 있다
넷째로 성경의 독특한 점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되는 것 인가이다. 즉 하나님의 자신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언약 내용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선의 뿌리로서 발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정통개혁주의 신학에서 독특하게 주장하였던 신학적 내용들을 실천적 의미에서 현대적으로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개혁신학의 예정론이 종종 전도와 선교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오해를 불식하고자 하는 의도는 어거스틴이래 오래되었고 그와 관련된 주제는 이미 해결을 본 주제이다. 칼빈도 그 사실을 반복하여 지적하면서 그의 유명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해서(De aeterna Dei praedestinatione)에서 로마서 1장 16절에 있는 그 복음을 핑계로 하여 하나님의 선택을 말살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였고 그렇게 제거하는 자들은 드높게 찬양하며 선포해야 할 이 일을 극도의 악의로 희미하게 만들며 겸손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일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펠라기우스 뿐만 아니라 칼빈 시대의 A.Pighius H.Bolsec Sebastian Castelio Sadoletus Georgius Siculus 등에 의한 예정에 관한 설교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 어거스틴의 반박을 통해서 반박하였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증거에 따라서 칼빈도 예정에 대한 말씀선포로 말미암아 최후까지 인내하고 전진케 하는 신앙에 대한 말씀선포가 방해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히려 예정론은 널리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기 위해서 경건이 전파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예정도 전파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칼빈이 1551년 10월 16일부터 12월 23일까지 예정론을 반대하는 이단들의 문제를 제네바 교회 전체와 더불어 종결하면서 그의 신학의 최종적인 완성의 성격을 이루었을 때 그 시점 이후 칼빈과 더불어 독립적으로 책을 출판하는 일에 Beza와 J.Knox가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J.Knox는 개혁과 선교의 가장 절정의 때에 예정론에 대해서 쓰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교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필연적이어서 그것 없이는 신앙은 참되게 가르쳐질 수 없고 확신하게 정립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인간은 그것 없이는 결코 참된 겸손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true himilite and knowledge of himself)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들 속에서 저울질하시는 우리의 선택은 우리 자신 안에 있지 않고 선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의 기뻐하심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듣고 의심함이 없이 믿을 때보다 적절하게 믿음을 세우고 존립 시킬만한 더 이상의 길이 없다. 세상의 휘몰아치는 폭풍들과 사탄의 공격들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육체의 변화무쌍함과 연약함에 의해서 버림받을 수 없다는 그런 확고함 속에 있다는 것이다. 걋?것의 원인을 하나님의 품과 의논 속에서 발견할 때만 우리의 구원은 보증이 있다7)고 하였다. 따라서 그 기초로부터 생명이 진행하고 우리의 위로가 결코 변동이 있을 수 없는 그 기초 위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완전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은 사탄도 전복할 수 없고 지옥의 문일지라도 그것을 이길 수 없는 우리의 피난성(a towre of refuge)이라고 한 것이다. 그 대신 인간론과 같은 그렇게 약한 근거 위에 기초된 모든 위로를 사탄은 쉽게 타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8).
마지막 말: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틀은 창조의 신비만큼 깊은 틀을 가지고 계신다. 그 사랑의 틀은 무(無)의 본질을 드러내는 차원도 있고 피조물 인간에게까지도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차원도 있다. 그렇다면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우주에 대한 신비는 더 이상 숨겨질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진리의 선물을 이미 가지고 있다. 모든 역사는 그런 진리의 선물을 오도하고 마치 없는 것처럼 묻히게 하는 역사이다. 기독교인들 사이에 교육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그런 긴 싸움을 싸우는데 있다. 우리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즐겨 싸우시는 방식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자신을 포함하여 종종 많은 사람들이 그 선물로서의 진리를 대적하여 스스로 다른 탈을 쓰고 고통하고 있다.
성경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방식은 역사선상에서 그가 택한 인격체와 단 둘이 역사하시기를 즐겨 하시고 모든 세상이 자신의 진리에 대해서 등을 돌 때 그 분은 가장 많은 일을 행하신다. 우리는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이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일하시는 인간을 한 사람이라도 배출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었다면 그것은 최대의 교육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의 소원에까지(빌 2:13) 마치 어느 한 개인의 자체 능력을 가지고 역사되도록 하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분은 홀로 일하시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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