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신약 고린도후서 5장16절~21절
제목: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
설교: 김 군 식 목사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사십니까?」 우리는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으면 참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한가지의 대답이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저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에게 자주들은 이야기이고 또한 저도 자식 셋을 키울 때에도 반복해서했던 이야기입니다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니까 「공부 좀 해라. 누굴 위한 공부이냐! 네 자신을 위해서 네 자신의 인생을 위한 공부이니까 열심히 공부해 좀 해라!」 이런 말씀을 들었고 저 자신도 이런 말을 참 많이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인생일 뿐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산다?
그러나 돌이켜 잘 생각해보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나 자신을 위해서 산다는 생각만으로는 내 삶을 바꾸는 그런 힘은 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서라는 생각만으로는 사람은 분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날 아껴주고 둘도 없이 나를 사랑해주고 믿어주는 가족들을 위하여 또한 회사 경영자들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있는 종업원들 즉 종업원들은 회사가 부도나면 다 실업자가 되니까 내가 분발해야지 힘써야지! 오히려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힘을 준다고 믿습니다.
어린 왕자의 동화작가 생택쥐페리라는 분은 원래는 비행기 조종사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때 비행기를 타다가 행방불명이 되신 분입니다.
교통이 불편한 아프리카에 비행기로 우편물을 전달하는 그런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어느날 이분이 타던 비행기가 광야에 불시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절망 상태에 있었을 때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니까 나는 꼭 여기서 살아 남아야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그래도 아무리 힘을 써보아도 도저히 안 되는 절망상태에서도 죽더라도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면 가족이 사망보험을 탈수가 없기 때문에 시체를 발견하기 쉽도록 힘을 내서 조금이라도 높은 언덕위에 죽을힘을 다하여 겨우겨우 올라갔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발견하여 살려주는 행운을 얻었다는 겁니다.
이렇듯이 인생의 마지막 때에 우리들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살아 남아야지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는 제가 보기에는 살 소망 힘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갈 힘이 어디서 오느냐하면 고린도 후서 15절에 있는 말씀은 인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그분을 위하여 나는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해답이라고 봅니다. 무엇을 위한 나의 인생인가?
적어도 우리 믿는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분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우리인생의 목적이다라는 겁니다. 그를 위해서 산다는 것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태어났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 인생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문제 이런 질문이 언제 우리에게 던져집니까?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뜻이 없고 허무하게 생각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그늘이 나에게 닥쳐올 때야 비로소 내가 이때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이후로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가? 이런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힘이 빠지고 살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인생의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이런 일은 늘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 사망의 그늘이 나에게 닥쳐올 때 이럴때에 죽음보다도 더 힘이 쎈 그 무엇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하는 것은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죽음이요 사망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제일 강하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으면 그뿐이지 부활 소망을 믿으면서도 죽으면 그뿐이라고 죽음 앞에 손들고 무릎꿇고 맙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우리를 살리는 힘은 어디에서 오느냐!
나를 살리는 힘 죽음보다도 더 강한 힘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보다도 더 큰 힘을 어디서 찾느냐? 14절 말씀에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죽음보다도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라고 하셨고 17절 말씀에 그리스도의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예수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사실은 우리의 인생을 괴롭게 하는 것은 돈이 없고 학력이 없고 먹을게 없거나 양반이 아니라서 얼굴이 못생겼기 때문에 인생을 성공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괴롭게 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죽음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인생이 사망에서 건저주신 것입니다. 일본야구 센트럴리그 야쿠르트 스와로즈팀이 있는데 구리야마 히데키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노력에 노력을 해서 겨우 일군등록을 했는데 메니에루병(현기증으로 눈이 도는 병)이라는 야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그를 간호하시는 어머님이 내가 너 대신에 아프고 싶다. 내가 오히려 너 대신에 병에 걸리고싶다. 그렇게 하시는 말씀을 하시면서 통곡하시는 어머니를 보았을 때 나는 절대로 이 병에 싸워서 이기겠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 기독교인은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 계시죠?. 내가 죽어야 되는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대신해서 죽음을 맡아 주셨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죽어야 될 내가 살았으니까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 오늘 의 성경에서 가르켜 주시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산다고 하는 삶의 근거가 되는 것 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 중에서 나를 괴롭히고 나를 어렵게 만드는 것 중에 또 하나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죄가 무엇이냐?
인생문제에 관해서 말씀드리면 우리 인간을 고독하게 만들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끊게 하는 것이 죄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인생은 나만을 위해서 살거나 내 가족만을 위해서 내 교회만을 위해서만 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죄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남과 연계해서 관계를 가지고 살게 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살게 하지 못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죄는 연대해서 살면 약하고 나 혼자 살라고 하면 강한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 인색하게 하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의 보수는 사망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망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내가 죽어야될 죽음을 대신 져주시고 그뿐만 아니라 죽음을 맡아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다는 큰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19절 말씀이나 21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책임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문제를 전부 해결해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해방을 받고 그래서 살 소망과 기쁨과 능력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의 중심이 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왜 사느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삶의 기쁨과 목적과 용기와 소망이 일어나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해서 이웃과 남들과 사이좋게 용서하고 용서해주고 용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사이좋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는것이 우리의 인생 근거가 있고 인생의 목적이 있다고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야하는 인생 그래서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예수님을 닮는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자가 된다는 오늘 말씀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상징이란 무엇인가하는 예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明治時代에 야스다 류우몬이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동경예술대학교에 다녔습니다.
和歌山현 출신으로 집이 무척 가난하여 고학으로 겨우겨우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졸업작품은 반드시 여자를 모델로 하여 그려야 하는데 모델을 살 돈이 없어 할 수 없이 학교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니까 인물에 상관없다면 내가 모델이 되어 줄께 라고 하시는 말씀에 힘을 얻어 어머님을 모델로 해서 그린작품이 최우수졸업작품이 되어 지금도 동경예술대학에서 보물로 여기고 있는 작품입니다. 대학에서 이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여 프랑스 유학을 보내줬습니다. 프랑스 유학중에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어머님에게 시를 만들어 바쳤습니다. 나는 어머님의 墓標(추모하는 기념비)가 되고싶습니다. 당신의 墓標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그 墓標에는 그 사람의 인생을 다 나타내는 글이 적혀 있으니까 나를 어머님의 묘표로 삼아달라는 얘기는 나를 보면 어머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죽어 주셨으니까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시 산다고 하는 주님과 나 사이에 「예수님 나를 당신의 묘표로 삼아주십시오. 예수님! 나는 당신의 묘표입니다.」라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내가 사는 오늘의 사는 모습에서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나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살아 계신 그런 흔적이 그런 모습이 있어야 되겠고 내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비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와 기독교를 위해서 죽어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산다고 할 때 우리 인생은 그대로 받아드리고 그 은혜가 우리의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고 희망이 되어서 그렇게 살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내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조금이라도 나타날 수 있고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피가 나오듯이 조금이라도 나타내고 비추는 삶이 되어 「무엇을 위해서 사십니까?」 라고 하는 질문에 예수그리스도의 墓標가 되고 싶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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