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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7일 주일] 세상을 이기는 힘

제목: 「세상을 이기는 믿음」
말씀: 요한복음 16:25~33
일자: `04. 3. 7
설교자: 김군식 목사님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도전을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인가 아니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믿음인가?「인데 우리는 승리하는 것같이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이 그밤에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제자를 대표하여서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제자들의 신앙은 마태복음의 16장에 나오는 빌립보 가이사르 도상에서 예수님에게 하였던 신앙고백과 비슷합니다. 이런 고백은 누가 복음에서도 당신은 메시아라고 마가복음에서도 주는 메시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고백들이 이후의 교회의 신앙의 기초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모두를 대표하여 하는 이신앙고백에 「나의 생명을 걸겠고 순교도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칭찬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 요한복음 16장 30절에 이로서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제야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라는 말씀은 실은 그러나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나 너희들은 각각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두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오늘밤에 나를 세번이나 부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화가나서 말합니다. 선생님 왜 나를 못 믿습니까? 나를 그렇게 의심하십니까? 라고 옥에 가더라도 같이 가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일이 있은 이후에 몇시간 되지 않아 한소년의 질문에 나는 그분을 도무지 모릅니다. 아무관계도 없다고 말합니다. 신앙으로 바로 서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미리 아시고 그러나 너희들이 각각 제곳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지금 그런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너희들의 신앙이 무너지고 좌절하고 패배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의 말씀은 우리의 인간의 연약함을 미리 아시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앙은 그정도의 신앙밖에 않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닭이 세 번 울고서야 베드로는 깨닫고 통곡하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그 이후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좌절하지 않는 신앙으로 돌아갔습니까? 어떻게 그런 믿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까?

다시 일어난 후 베드로의 믿음이 좌절전과 똑같았습니까? 좌절전에 옥에도 같이 가고 같이 죽겠다는 신앙을 다시 회복했을까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상에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합니다.」 두 번 다시 패배하지 않는 신앙 즉 세상을 이기는 신앙을 주님께서 너희들에게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목표를 삼아야하는 우리가 서야하는 신앙은 이제부터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신앙입니다. 어떤 환란을 당하더라도 협박도 죽음도 악마도 나를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빼앗지 못하고 나를 죽일려고 하는 원수까지도 회개시킬 수 있는 그런 신앙이 세상을 이긴다는 신앙이라고 봅니다.

이런 신앙이 어떤 신앙인가.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십자가의 신앙입니다. 용서의 신앙입니다
누가복음에서 마지막 만찬에 베드로가 나는 당신을 따라갑니다. 절대로 배반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주예수는 말씀합니다. 누가복음22장 32절에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 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주님은 말합니다. 너는 그렇게 담대히 말하더라도 너는 좌절한다 무너진다 넘어진다 나를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베드로 너를 위하여 기도한다. 너가 다시 일어 설 때에 너의 형제와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위로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에 일어날 일을 모두 다 아시고 이야기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베드로가 넘어지고 좌절할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 휼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라는 점이 아니고 넘어지는 베드로를 위하여 주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기도가 중보의 기도입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신앙을 버리는 나약한 아무 쓸모 없는 죄인인 나를 위하여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런 예수님의 존재가 베드로를 다시 일어서게 한 근본적 힘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중보의 기도를 십자가상에서 하시는 것을 보고 회개합니다. 배반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같은 나약한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휼륭한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으로서 다시 일어난게 아니라 그정도의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서는 아무것도 않된다는 것입니다. 넘어지고난 후의 베드로의 마음에서 솟아난 믿음은 무엇입니까.

좌절했던 자기자신을 위해서 버리시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중보의 기도를 하신다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배반한 나같은 사람을 예수그리스도에 나타난 참된 사랑이 나를 살리시고 지키신다는 고백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적인 기독교를 베드로가 전한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온몸을 다하여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죽어주시고 살아주신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주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메시아라는 신앙 고백위에 단순히 베드로가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좌절하고 자신의 신앙에 넘어진 나약한 나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다시 일어날수가 있었습니다. 단순한 믿음고백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주님을 위해 순교한 사실은 주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하신다는 그런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제국시대에 기독교에 박해는 300년 동안 엄청났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숨어가면서 지하에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당시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래서 기독교를 원수로 적으로 삼기보다는 친구로 삼아서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동쪽의 게르만의 침입의 위험과 쾌락으로 인한 사회부패의 문제가 로마에는 있었습니다. 사람은 쾌락에 빠짐과 한편으로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이용하고자하였습니다. 기독교를 통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도덕을 만들고 로마의 일치를 도모하고자한 것이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황제는 기독교야 너희들에게 부탁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피난하고 숨어지내는 교회가 위로부터 가르치는 위치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승리하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기독교가 부패하기 시작하였다고 저도 다른 분들도 보고있습니다. 교회의 가르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모든 것은 이단으로 박해하였습니다. 교회밖으로는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로마제국이후의 신앙의 내용과 성경안에 있는 신앙의 내용은 큰차이가 있습니다.

일본도 지금부터 400여년전 중세 로마카톨릭의 가르침을 가지고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복음을 전하려고 일본에 왔습니다. 짧은 시간에 일본의 영주들이 개종하고 급속히 일본사회에 기독교가 퍼져 갔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토구가와 이에야스등이 기독교에 큰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갑자지 박해가 시작됩니다. 기독교를 믿으면 다죽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독교인들이 낙심을 했는지 모릅니다. 넘어진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소수입니다만 끝까지 믿음을 지킬려고 순교한 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로마시대의 기독교는 일본보다는 더심하고 엄청난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망하지 않습니다. 로마시대의 기독교는 300년간의 엄청난 박해속에 순교한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속에 멸망하지 않고 오히려 지하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아무도 멸망시키지 못하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황제도 이를 이용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400여년전에 복음이 들어와서 부흥하게 됩니다만 박해가 시작되자 기독교는 없어집니다. 교회는 망했습니다.

로마시대의 기독교의 순교의 역사와 일본의 순교의 역사는 틀리다고 봅니다. 로마의 기독교는 엄첨난 박해속에서도 기독교는 더욱 퍼져가고 아무도 멸망시킬수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황제조차도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일본은 박해 당했을때 기독교는 없어졌습니다. 로마의 교회는 발전하고 번성하였는데 왜 일본의 기독교는 없어졌을까요?

일본의 큐슈섬어디에는 신앙을 지키고자했던 숨은 크리스챤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왜 모두가 없어졌을까요?
그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많은 차이가 있겠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당시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일본에 전한 복음의 내용에 있지 않는가 라고 봅니다. 그당시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약속입니다. 충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신앙을 지킴으로 부활승천하여 천국으로 간다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절대로 배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켜야 하느님나라에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지킨다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서는 박해를 이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성경에서 보면 베드로도 지킬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용기를 내세요라고 말하고 저는 당신을 지키겠다고 주님께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주님께서 나를 지켜달라고 부탁한 적도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기대도 않했습니다. 순교는 정말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우리자신이 당할 용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께서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라고 이렇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예수님이 가르치셨느냐! 하나님께 대적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십자가의 사랑을 어디까지든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신앙이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으로 기독교 소설가로서 일본인 엔도 슈사큐가 있습니다. 그의 소설 침묵은 유명한 합니다. 토쿠가와 시대에 크리스찬 박해를 위해서 크리스찬을 찾아내고 박해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를 새긴 그림을 밟으라고 합니다. 밟으면 안죽고 안밟으면 죽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밟고 신앙을 버린 사람이 많습니다.

이소설의 테마는 밟지 않고 순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밟고 인간의 죄와 모순속에서 그아픔을 함께 나누는가 라는 두가지중 하나를 택하도록 우리에게 묻고있습니다.
그것이 이소설의 주제입니다만.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나라에 가느냐 밟고 회개해서 하나님의 고통을 너희들도 택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소설을 읽으면서 중대한 것이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를 고문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질문이 이소설에 빠져 있다고 봅니다. 내가 죽고 천당에 가는 내구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가 있는가 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를 박해하는 자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소설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한 사랑의 마음이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소설에는 없습니다. 내구원 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수와 싸워서 내신앙을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랑의 마음이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우리에게 고통 주는 자를 위해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하나님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순교도 사랑이 없으면 무익하다고 말합니다. 로마시대에 기독교는 박해를 당하면서 어떻게 성장할 수가 있었느냐하면 이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랑의 신앙이 초대교회의 교인들에게 있었기에 성장했다고 믿습니다. 로마시대의 한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기독교교인이 옥중에 갖혀 있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옥중에서 기독교인을 감시 고문하는 간수 병사가 있었습니다. 찬송을 할 때마다 가죽으로 때리고 박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들리는 소리에 이간수의 어머니가 죽게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옥중의 기독교인들이 죽게된 이간수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회를 갖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같은 로마병사들도 기도하여 주지 않는데 매일 자신에게 매를 때리는 원수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를 하느냐 하여 감동하여 기독교교인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요. 원수의 마음 깊은 곳에 들어가서 원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이기는 신앙입니다. 세상에 환란이 있을때 세상을 이겼다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그사람을 하나님을 믿는다는 내가 그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느냐! 그런 믿음을 내가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서 늘 말합니다. 사실은 일본인은 우리 한국인에 대해서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해방후 50수년이 되었지만 일본은 잘못했다 라고 사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반대로 우리는 잘했다 라고 하지요. 한국사람들이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우리는 일본을 위해 예수님처럼 중보의 기도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서 충성도 좋습니다. 그렇게 하여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진정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그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환란도 이길수 있습니다. 세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세상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늘 항상 중보의 기도를 해야합니다. 목사님 기도하여 주세요 하면 저는 기도합니다. 저는 저의 자식보다 교인들을 위해 더많이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이라크를 위해서 팔레스타인 등등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려면 시간이 정말로 모자랍니다. 이 기도를 할 때 세상이 바뀔꺼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신 말씀을 감사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무엇인지요?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였지만 부인하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도 기도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졌습니다. 주여 우리들도 나를 미워하고 고통주고 괴롭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이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자가 되도록 우리를 축복하여 주십시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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