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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18일] 우리교회의 교회생활

우리교회의 교회생활
설교자: 오대식 목사님
2004. 7. 18.
마5:13-16

언젠가 꽤 오래 전 한국의 모 일간지에는 (2002년 10월 13일자 조선일보) 오늘날 한국교회에 영향력이 있는 어느 중견목사님의 인터뷰기사를 내 보내며 그 첫 문장을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 교회들은 당신들의 천국인가?」

저는 그 조소가 섞인 첫 문장을 대하고는 가슴이 콱 막히는 답답함과 온 몸이 떨리는 전율로 더 이상 기사를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한 문장의 말로 인해 그 전체의 기사가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 한 이유는 그 말이 한 기자의 펜에서 나온 글의 유희가 아닌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부르짖는 외침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개신교 교회들은 당신들의 천국인가?」

요즘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직시해 보시기바랍니다. 정확한 정보와 깊은 내막의 사연들은 우리가 다 모른다 하더라도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만 나열해 봐도 우리는 교회가 얼마나 세상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목사님이 아들 목사에게 교회를 넘겨주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고 교회의 돈을 마치 목사 자신의 것인 양 마음대로 유용하는 사례가 있으며 몇 몇 목회자들의 윤리는 세상에 내 놓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축복하고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의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책망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비록 저는 아직 미숙하고 목회를 잘 모르는 젊은 목회자이지만 교회가 사회적으로 희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만큼 목사로서 괴롭고 힘든 시간은 없었습니다. 특별히 요즘과 같이 사회적으로 한국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가 수준이하라는 것을 세상의 사람들이 언론매체를 통해 융단폭격을 해 올 때면 차라리 목사의 옷을 벗어 도망하고 싶은 생각마저 간절하게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목회 현장에 대해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와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한 애착을 갖고 남아 있으려 발버둥치는 이유는 제게는 한국교회에 대한 희망이 오늘날의 절망보다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무차별적인 사회적 질타에도 불구하고 제가 한국 교회에 대해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가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이래 최근까지 역사적으로 이 사회에서 감당해 왔던 일들이 너무도 귀했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로 살펴보면

첫째로 한국교회는 복음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근대사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서방의 기독교는 항상 세계의 식민지 정책의 앞잡이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기독교에 대해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도 기독교에 대해 탄압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와 비우호적인 나라인 인도 등을 보면 그들의 기독교에 개한 감정이 어떠한지 족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한국교회의 깊은 뿌리를 캐 보면 우리 스스로 복음에 대한 갈망이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 서방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국내에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는 서상윤 이라는 사람이 중국에 가서 복음서를 번역해 가지고 온 것을 비롯해 기독교의 복음을 먼저 갈망하여 우리 스스로 들여오게 된 것입니다. 서방의 선교사들이 이 땅에 상륙하고부터 효과적인 전도를 할 수 있었다고 서방의 교회들은 말하지만 그 배경에는 바로 이 땅에 먼저 복음을 믿고 있었던 준비된 전도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한국의 기독교는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민중을 깨우고 일으키는 일 그리고 그들을 돕는 일 들을 해 왔습니다. 교회는 선교의 초기부터 학교를 세워 우매한 백성에게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점점 잃어버리는 한글을 가르쳐 주었으며 또 의료 시설을 세워 죽어 가는 민중을 살리는 일을 해 왔던 것입니다. 전쟁의 난리 속에서는 고아원과 모자원 등을 설립했으며 급성장한 경제의 뒤편에서는 항상 소외된 노인들과 가난한 자들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한국 교회는 비록 큰 힘은 없었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 귀한 일들을 놓치지는 않았습니다.

셋째로 한국교회는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그리고 사회주의 공산치하 속에서 또 독재정권 속에서 일관된 모습으로 불의에 저항했던 힘을 갖고 있습니다. 즉 옳고 그름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정의의 편에 늘 서 있었고 강자와 약자의 대립 속에서 교회는 항상 약자를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영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환경의 변화에 굴하지 아니하고 상황적 위협에 겁먹지 아니하고 항상 지켜 왔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사분오열의 습성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영성은 극도로 혼란하고 깊이 세속화되었다는 것 때문에 평가절하 되고 또 멸시를 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교회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어서 한국의 교회는 이런 역사적인 의미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100년이 조금 넘는 짧은 기간이지만 복음에 대한 열정 민중에 대한 헌신 그리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저항력 바로 이런 교회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국교회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는 이유도 앞으로도 한국교회가 역사적인 그 맥을 계속 이 세상에서 이어 나갈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가능성으로 인해서 하나님도 우리의 한국교회를 진노 중에 놓아두지 아니하시고 강한 팔로 붙들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여지없이 망가지고 퇴색되고 무의미해졌다 해도 그것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이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교회를 버릴 수 없는 것이며 버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싫고 밉고 너무 냄새가 나서 관계하고 싶지 않더라도 우리 하나님이 교회를 버리지 아니하고 끌어안고 계신다면 그 교회를 우리도 우리의 품안에 끌어안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의 가능성 앞에 하나님은 오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무의미해 진 이 명령은 어쩌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 있는 마지막 요구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무능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느끼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을 두려워 할 것이 나이라 진노하신 하나님께 밟힐 것을 더욱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경 본문의 글자 뒤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나타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향수병에 향수가 들어 있지 않으면 점점 그 향기를 발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해 그 하나님을 절대로 보여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를 봅니다. 교회가 영성이 혼잡하고 무의미하고 타락하고 세속화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 자체가 혼잡하고 변질되고 타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의의 변질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의의 소유가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한국교회의 자랑으로 간직되었던 그 하나님의 의를 이제는 더 이상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인의 수와 재정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총회나 노회의 높은 자리 등에 많은 교회들이 희망을 두며 희비가 갈리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것으로 교회의 목표를 삼고 교회희망의 근거를 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 여기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봉사하고 또 바르게 목회 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총회나 노회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함도 아니고
교회가 재정적으로 넉넉해지기 위함도 아니고
건물을 멋있게 짓기 위함도 아니고
좋은 사람을 많이 모으려 함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의가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희망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교회는 인간적 편견과 혼란과 무기력에 삼켜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을 끝까지 극복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교회는 무너진 교회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합니까?



1) 교회 내적으로는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목사나 장로 혹은 창립 멤버 등 특권층에 예속되어 있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거룩한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입이 거룩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입이 먼저 거룩한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이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입이 거룩한 자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입이 아닙니다. 삶이 거룩해야합니다. 삶이 거룩하지 못하면 잘라내야 합니다. 교회는 그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함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종과 계급 교파를 초월하여 화해와 일치를 추구해야합니다. 문화와 인종과 계층의 편견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주님의 몸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일치를 상실해 나갈 때 교회는 그 때부터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40년 된 교인과 오늘 등록한 교인이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목사 장로와 평신도가 함께 교회를 위해 고민할 수 없다면
정상적인 사람들과 장애의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봉사할 수 없다면
많이 소유한 부자와 정말로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자가 한 상에서 떡을 뗄 수 없다면
호남과 영남이 다르다는 이유로 하나 되지 못하고
학력의 차이는 생각의 깊이와 넓이의 차이라고 우기면서 서로 대화하기조차 거부한다면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해 다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보이려는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원래의 기능을 되찾으려는 그 당찬 꿈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2) 교회 외적으로는 높은 윤리와 도덕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의 권세는 지위와 명칭에 있으나 하나님의 권세는 섬김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충된 문제도 바로 이 섬김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더 높으냐 에 관심이 있었던 반면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크고자 되거든 남을 섬겨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윤리는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에서조차 한없이 낮아져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우리가 세상은커녕 교회 안에서조차 오히려 높아지려고 하는 모습을 볼 때 그나마 남아 있는 한국교회의 마지막 희망이 송두리째 깨져버리는 것을 느낍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낮아짐의 무대는 교회를 초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교회에서조차 낮아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조차 낮아지기를 거부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교회를 향한 손가락질이 어떻게 없어지기를 바라십니까?

더 낮아져야 합니다. 낮아진 자세로 세상의 낮은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합니다. 낮아진 그 모습으로 세상의 외롭고 괴로운 자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듯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내적으로는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함을 말하고 교회의 외적으로는 낮아짐으로 더욱 높은 윤리와 도덕성을 나타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이렇듯 거룩한 공동체 의식과 세상적으로 더 높은 윤리의식을 갖고 항상 사회를 견제하고 충고 해 왔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습니다. 성경의 기록과 한국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교회의 거룩함과 높은 도덕성으로 인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 권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이러한 영적 권세이며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이 영적 권세의 붕괴인 것입니다. 뭇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피조물의 본분 됨을 가르쳐야 할 교회의 영적 권위가 상실된다면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실천은 고사하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교회가 창립 20주년을 맞이해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는 한국의 어느 교회의 간절한 기도가 새삼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주님!
여러 교회들 가운데 또 하나의 교회를 더하지 말게 하옵소서
종교적 허세만 가득하고 정작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의 교회를 또 하나 세우지 말게 하소서
사람을 위한 직함만 줄줄이 만들고
정작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교회를 만들지 말게 하소서
내가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명쾌한 자기 인식 없이
행사에 바쁜 사교클럽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전략적으로 이 땅에 구축하는 야전벙커가 되게하시고
행정에 분주한 동사무소가 되지 말게 하소서.
(설교 후 기도)

교회를 보시며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 교회를 끌어안으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일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동경교회가 주님 쓰시기에 편하고 좋은 교회되기를 기도합니다.
동경교회가 한국교회의 역사적인 좋은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그런 교회되기를 기도합니다.
동경교회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어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교회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교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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