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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4일 주일] 본질적 신앙 현실적 신앙



본질적 신앙 현실적 신앙

마19:16-22




식당을 경영하시는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권사님이라고 하면 신앙이 꽤 좋을 것 같은데 그 권사님은 약간 달랐습니다. 평소에는 신앙이 참 좋아서 교회 일도 열심이고 어려운 교인들도 잘 도와주었지만 가끔 많이 힘들어 할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주기적으로 힘들어하시는 것인가?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장사가 잘 되어서 돈을 많이 벌면 활기차게 신앙생활을 하고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교회생활까지 열심히 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제 생각이 아니라 그 분이 제게 직접 얘기해 준 것입니다. 자신은 장사가 되지 않으면 즉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돈이 있어야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 교회 일도 많이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목사인 제게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기도부탁을 하셨습니다.

많은 부분 이해가 가는 현상입니다. 자 여러분의 호주머니에 돈이 없습니다. 방세는 내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당장 밥 먹을 돈 조차 호주머니에 없습니다. 식구 중 한 사람이 건강을 잃었습니다. 병이 낫도록 기도했건만 오래도록 병세가 회복되질 않습니다. 자 이럴 때 여러분에게 있어서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앙생활과 현실 생활이 연결이 되십니까? 아니면 신앙과 현실은 본래 다르기 때문에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신앙이 약한 교인에 대하여 가르치려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직도 매일 매일 이런 상황과 싸우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입니다. 목사가 그렇게 믿음이 없냐고 말하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도 신앙과 생활 속에서 갈등하며 싸워나가고 있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르긴 해도 이 싸움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 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항상 일치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믿음으로 인해 늘 스스로 힘들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때는 신앙생활이 신이 나다가도 또 어떤 때는 신앙이 필요 없는 것 같이 많이 힘들 때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이중적인 현상이 어떤 이유에서 오는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교회 생활이 재미있다가도 또 어떤 때는 교회생활이 괴롭게 느껴지는데 그런 현상은 왜 오는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혹 이런 문제로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해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 문제를 풀어 나가는데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리학에 보면 <엔트로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을 말하는 물리학용어입니다. 신학을 전공한 제가 물리학 용어를 정확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온도가 다른 두 물체가 서로 접촉을 했을 때 두 물체의 온도가 같아질 때까지 <열>은 뜨거운 물체에서 찬 물체로 흐른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을 <엔트로피 원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엔트로피 원리>는 꼭 온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물의 높이 즉 수위가 서로 다른 물통 두 개에 수로를 뚫어 놓으면 언제나 수위가 같아질 때까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것도 바로 <엔트로피 원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심리학자 <구스타프 칼 융>은 사람의 인격의 변화의 역학을 설명하기 위해 이 <엔트로피 원리>를 인용합니다. 그는 사람의 모든 정신 내부에는 정신에너지라는 것이 있는데 그 에너지는 모두 일정한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고 말합니다. 즉 사람에게는 정신적 에너지가 여러 갈래로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서로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그 에너지는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설명을 드리자면 내 안에 가치기준이 서로 다는 두 개의 정신적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 두 개의 정신에너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균일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똑같이 되는 과정은 정신적 에너지의 강도가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긴장과 갈등 스트레스 등은 심리학에서의 전문용어로 말할 때 우리의 정신세계의 에너지가 약할수록 많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신적 에너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갈등도 없고 스트레스도 적게 받는다는 말입니다. 반면 에너지가 약하면 그 정신을 지키는 힘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흔히 그것을 가치기준이 약하다고 말을 하는데 가치기준이 약하니까 적은 일에도 흔들리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긴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될 수 있는 대로 약속시간에 10분 전 쯤 나가 있어야 불안한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약속 시간에 늦으면 제 마음 속에서 많은 생각이 떠올라 불안해하고 또 긴장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 둘째 딸은 학교 수업시간이 다 되서야 집에서 나갑니다. 학교에 늦지 않냐? 고 야단도 쳐 보지만 제 딸은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늦으면 늦는 것이고 선생님께 야단맞으면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긴장이 없습니다. 학교만 가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부분에서는 강한 정신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분에 따라서 사람들은 강한 에너지도 갖고 있고 약한 에너지도 갖고 있지만 이 정신적 에너지의 강도가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약한 기준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경제 용어로 볼 때 <악화가 양화를 구축 한다>는 말과도 같은 개념입니다.

이렇게 계속 약한 쪽의 가치관으로 인해 받게 되는 갈등과 긴장은 결국 모든 부분에까지 확대가 되어 강한 에너지까지도 허물어뜨려서 붕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약해진 정신적 에너지는 자신의 내면의 갈등과 긴장을 해결하지 못해서 결국 폭발하고 마는데 이것을 융은 <인격적 붕괴>라고 말합니다. 확고한 강한 정신적 에너지가 없는 한 사람들은 갈등과 긴장 속에 살다가 인격적 파탄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평소 얌전한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겹치게 되면 이상행동을 하게 되고 생활이 무너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위의 사람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인격적 파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융은 정말 정확하게 사람의 정신세계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융의 그 이론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숭실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을 때 어느 날 고3 학생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꽤 모범적인 학생이었는데 제게 진로에 대한 상담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잘 믿었던 그 학생은 자신이 가고 싶어 하는 학교와 학과를 정해놓고는 매일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강한 마음을 갖고 꾸준히 신앙생활과 학교생활을 잘 하던 이 학생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학교 중간고사 시험 성적이 나온 후였습니다. 학교성적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자 많이 힘들어하면서 저를 찾아 왔던 것입니다. 그 학생은 저를 보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확신이 서지를 않습니다.」

학교에서 모범학생으로 공부도 잘 하고 신앙생활도 잘 하던 학생이었는데 성적이라는 또 다른 가치관에 부딪혔을 때 그는 갖고 있는 신앙의 가치관마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융의 이론으로 설명을 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그 학생이 갖고 있던 신앙은 강한 에너지였습니다. 적어도 대학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는 강한 정신에너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성적에 있어서는 가치관이 확고하질 않습니다. 성적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 같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면 성적이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공부에 있어서는 뚜렷한 확신이 없습니다. 약한 정신적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강한 에너지와 약한 에너지가 한 마음 안에서 공존합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약한 에너지 때문에 강한 에너지가 붕괴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성적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강했던 에너지가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융이 말하는 것은 강한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약한 에너지가 우리 안에 함께 있기 때문에 흔들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약한 신앙 때문에 하나님께 향한 강했던 신앙마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밥 먹여주나?」
「일요일엔 쉬어야지 쉬어야 또 일을 나가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믿겠는데 그런데 밥은 돈이 있어야 먹을 수 있어!」

저는 빠찡꼬에서 교인들의 헌금을 다 써버린 목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 분도 설교 시간에는 하나님만 믿으라고 설교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설교를 할 때는 그런 믿음을 갖고 설교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면 빠찡꼬에 가 앉아 있습니다. 단순히 돈에 욕심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면을 따지고 들어가면 두 가지의 신앙 에너지가 있는 것인데 현실적인 문제 금전적인 문제에 있어서 너무 약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강한 에너지가 없다 보니 하나님 신앙마저 붕괴가 되어 신앙적 파탄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학교의 성적을 통해서도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학교의 성적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돈을 통해서도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지만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을 확고하게 믿으면 믿을수록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인해 신앙적 갈등을 하다가 신앙적 파탄을 당한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과 대화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부자 청년이 말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제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계명을 지키시오」
「저는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시오. 그러면 하늘의 보화가 당신에게 있을 것이오」
성경은 말합니다. 그 때 청년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재물이 많아서 근심하며 갔다고 말합니다.

융의 시각으로 봅니다. 이 청년은 신앙도 있었고 물질에 대한 가치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의 가치관은 그 에너지가 약한 반면 신앙의 가치관은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강했습니다. 그러나 돈에 대한 약한 가치관이 있었기에 그가 갖고 있던 신앙도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뿐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또 한 사람 이스라엘의 사울 왕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갈 때면 늘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싸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서 전쟁터로 갔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집니다. 길갈에서 블레셋과 전쟁에 나가기 위해 사무엘 제사장을 찾았는데 사무엘이 7일이나 늦게 도착을 합니다(삼상13장). 사울 왕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이 늦는 사이 전쟁에서 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세상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제사장이 오기 전에 자신이 직접 번제를 드립니다.

융의 시각으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켜주신다는 가장 중요한 신앙에는 신앙의 에너지가 강했습니다. 전쟁 전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바로 이 강한 에너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시간의 문제에는 약했습니다. 빨리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전쟁에서 질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에너지가 약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안에 있던 그 신앙의 에너지는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 흐르게 되고 결국 약한 신앙으로 인해 강했던 믿음마저 잃고는 신앙적 파탄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찌 이 부자 청년과 사울 왕 뿐이겠습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날마다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고민이 늘 여기에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적 갈등이 아주 복잡한 것 같지만 아닙니다. 결국은 다 이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신앙으로 살려 합니다. 교회생활이 재미있고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예배에 빠짐없이 나오고 설교도 잘 듣습니다. 적어도 이 부분에는 에너지가 강합니다. 그런데 생활 중에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낙심하게 됩니다. 현실에 있어서는 약한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뭔가 잘 될 것 같은데 계획대로 되질 않으면 불안합니다. 긴장이 됩니다. 그래서 다른 힘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고 또 실질적으로 다른 힘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자꾸만 신앙으로 살려고 하는데 뒤에서 뭔가 자꾸만 끌어 내리려 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두 가지의 신앙 에너지로 인한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본질적 신앙 현실적 신앙으로 분리해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꽤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시련이 닥치면 자꾸만 낙심하게 되고 결국 신앙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처음부터 현실적 문제에 신앙의 에너지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강한데 현실이 약했습니다. 그런 신앙을 소유했기에 어려운 문제가 닥치게 되면 신앙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 신앙에도 강한 에너지가 있으면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결국 승리케 해 주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도 승리의 과정이라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혹 실패해도 혹 어려움이 닥쳐도 갈등이나 긴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업에 성공을 해야 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업에 실패를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니 실패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일리는 있으나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실패에도 길이 있습니다. 실패를 통하여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사실은 성공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보다 실패를 통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신앙 환경이 변하고 세상이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그 신앙 그 신앙이 바로 강한 신앙인 것입니다. 새로운 가치관이 계속 유입이 되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킬만한 요인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 그것이 바로 강한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들이 쉽게 믿음을 포기하는 이유는 원래부터 믿음이 적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 신앙과 현실적 신앙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약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의 왕실과 처칠 수상은 전쟁이 발발하던 그 날 영국교회에 다음과 같은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같은 시간에 영국 전역에 있는 교회에서 함께 종을 울려 달라고... 그 종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심기 위한 <희망의 종>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또 영국 왕실은 영국 성공회의 존경받는 주교였던 윌리엄 템플 주교에게 전 국민에게 보내는 라디오 방송설교를 의뢰하였습니다. 템플 주교는 그 역사적인 설교를 이렇게 하였습니다.

「대영제국의 국민여러분 잠시 후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는 종을 울릴 것입니다. 종소리를 듣거든 우리 모두 교회로 나갑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합시다.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입니다.」

전쟁이라고 하면 사람이 당하는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일 수 있습니다. 온 국민 뿐 아니라 개인까지도 불행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갈등합니다.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공호에 들어가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신앙은 결국 현실적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둘 다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방공호로 들어가기에 앞서 가장 먼저 교회로 갔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다시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우리교회 교인들은 본질적 신앙이 아주 강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현실적 신앙은 어떻습니까? 본질적 신앙이 강하시다면 현실적 신앙도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많은 괴로움이 여러분께 있다 해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을 다시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교우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주시옵소서.
많이 힘들고 또 어려움이 있어도
세상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지 않게 하시고
먼저 하나님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강한 믿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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