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HOME SiteMap Contact Us Japanese Korean English Chinese
Information
   

[2005년 9월 4일 주일] 기독교의 힘 (2)


기독교의 힘 (2)

빌1:12-18




어려서 좋아했던 스포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프로 레슬링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프로 레슬링은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꿈이었습니다. 프로레슬링을 하는 날에는 동네의 모든 어린이들이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다 모여 레슬링을 보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선수는 김일과 천기덕 선수입니다. 아쉽게도 일본에서 유명한 역도산은 제가 잘 알지 못합니다. 김일의 박치기 천기덕의 당수는 당시 어린아이였던 제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어쩌다가 일본의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끼와 게임을 하는 날이면 그 날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온 동네 어른들까지 다 텔레비전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은 프로 레슬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프로 레슬링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다 「쇼-」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제가 어려서 그렇게도 프로 레슬링을 좋아한 이유는 바로 그 프로레슬링이 「쇼-」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편이 맞아 쓰러져도 물어 뜯겨 피를 흘려도 그렇게 걱정하질 않습니다. 그것이 다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은 우리 편이 궁지에 몰려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마음 졸이지 않습니다.

프로 레슬링은 「쇼-」입니다. 「쇼-」라는 것은 드라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에는 내용이 있고 과정이 있고 꼭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기에는 역적에 역전 반전의 반전과 같은 스릴과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팀을 정해 놓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편이 맞아 눕는 것도 우리 편이 그로기 상태가 되는 것도 좋은 결과를 위한 의미 있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도 그렇습니다.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한 라든가 알란 라드의 <쉐인>등과 같은 영화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총격전이 벌어져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주인공은 매를 맞고 총을 맞아도 잘 죽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처해도 결국 빠져 나옵니다. 그것이 각본이기 대문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눈을 감고 총을 쏴도 상대방은 다 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화는 예정된 드라마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인공이 어려움을 당하는 사건 하나하나가 더 멋져 보이는 것입니다. 왜야하면 나중에 역전이 되어 주인공이 악당들을 다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나리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역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사란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시각으로 볼 때 역사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주도하시는 한 편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볼 때는 결코 우연이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필연일 뿐입니다. 모든 상황과 사건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간혹 이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은 역사를 가리켜 서로 물고 물리는 생존경쟁이라고 하기도 하고 자연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라고도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볼 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분명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는 하나의 작품이요 드라마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지향하는 바가 있고 하나하나의 상황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라마이기 때문에 뚜렷한 목표를 갖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의 일생도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느끼십니까? 여러분들이 지나 온 삶을 한 번 되돌아보십시오. 필요 없는 사건이 혹 있었습니까? 힘든 일들이 있었습니까? 부끄러운 일들이 혹 많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는 즉 내 삶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하나의 드라마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에는 그것이 매우 고통스럽고 부끄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불행했던 사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나가는 것임을 알게 된 후에는 생각과 시각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길은 하나님의 인도이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나에게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의 생애를 통하여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거기에 있음을 내가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은 누구입니까? 우리 믿는 자들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음이 좋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창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과 온 가족들은 짐을 꾸리고 이동을 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가나안에 들어 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약속을 두 가지 해 주십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밟고 있는 땅을 모두 그에게 주겠다고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당시 90세였던 그에게 유업을 이을 수 있는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고 자신의 전 생을 걸고는 하나님을 좇아갑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의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은 자꾸만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나선 순례의 길은 점점 더 고난의 길로 변해갑니다. 급기야 아브라함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갑니다. 굶어 죽건 말건 한 번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가서 거짓말을 해 가며 양식을 얻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의 자손이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 할 것을 예언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심을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송두리째 내 놓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입니다.

또 하나 아브라함의 실수는 하나님이 자식을 주겠다고 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90세가 넘은 아브라함은 아내로부터 아이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아내의 여종이었던 젊은 여인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그 때부터 이삭의 자손인 이스라엘과 이스마엘의 자손인 이슬람의 싸움은 아직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100세가 됐건 200세가 됐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려야 했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과정에서 우리는 곧잘 지칩니다. 내 나름대로 판단을 하려 듭니다. 점점 불안해 지니까 내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내 방법대로 이루려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바른 믿음 위에 서 있지 못하고 휘청거립니다. 아브라함도 휘청거렸습니다. 그렇게 휘청거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창17: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 말씀을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이런 말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네 일생을 책임지고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믿고 나만 따르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살 때 우리가 자주 쓰러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가는 길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 하다는 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기도 하고 낙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내가 당하는 현재의 처지에 담긴 미래의 의미 소망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미래적 의미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은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모르고 가는 길은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끌려가듯 쫓겨 가듯 사는 인생은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스스로 택하고 알고 가는 길이라면 아이들이 화창한 소풍날에 소풍을 가듯 기쁘고 가벼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의사가 되려면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인턴 레지던트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의 사람들은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월급은 적데 받으면서 대학병원에서 일주일씩 양말도 갈아 신지 못할 정도로 바쁜 병원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그렇게 힘들다고 의사를 그만 두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은 후에 의사생활을 하는데 유익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참으면 월급도 많아지고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나약성 인간의 이성적 비판 인간의 무능 더욱이 지난날의 실패했던 것을 다 십자가 앞에 묻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다시 받고 다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여 복된 자로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내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내 앞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든지 근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상황을 당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실패하건 성공하건 부해지건 가난해지건 그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소유나 지위도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복된 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지향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의 자세는 우리의 인생의 길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나를 이끄시는 분이 누구냐? 나의 삶은 약속대로 선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가? 현재의 어려움은 선한 목표를 향한 과정인가? 아닌가? 그것을 아는 것에 우리의 삶의 태도는 바뀌는 것입니다.

구약에 아브라함이 있었다면 신약에는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을 보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불행하게도 옥에 갇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로마의 감옥에 2년간 갇혀 있었을 때 쓴 성경이 바로 빌립보서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평생을 복음을 위해 희생했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그 당시에는 메스컴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이 있어 사람들이 집에서 복음을 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도바울을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많이 돌아다니고 사람을 많이 만나 복음을 전해야 했던 시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몸이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전도자였던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복음을 전하라고 해 놓고는 왜 이렇게 몸을 붙들어 놓습니까?」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데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이렇게 있다가는 복음의 증거는커녕 그냥 죽고 말 것입니다.」
라고 원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그 어려움을 이기려고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길은 계속 반대로만 진행이 됩니다. 그는 자유롭게 되기는커녕 로마로 압송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황제의 감옥에서 계속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단어가 두 개 나옵니다. 그 중 하나는 바로13절에 나오는 <시위대>라는 단어입니다. 이 <시위대>는 헬라어로 <플라토리온>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냥 시위대가 아니라 황제의 시위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당시 황제의 시위대와 관계된 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당시 로마의 네로 황제는 자신의 궁전에 일 만 명의 시위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 시위대의 신분과 힘은 대단히 큰 것이었는데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 시위대에게 황제는 그만큼의 권세를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이 시위대로 근무하는 기간은 12년 이었는데 12년간 군 생활을 하고 나면 그들에게 로마의 시민권과 250파운드나 되는 금화를 주었습니다. 신분이 상승되고 돈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팔자 고치는 것입니다. 로마의 상류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시위대는 황제에게 죽도록 충성을 다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갇혀 있던 로마의 지하 감옥에는 <할루시스> 라는 쇠사슬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할루시스>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이 <할루시스>라는 쇠사슬은 죄수의 팔과 감시원의 팔을 함께 묶는 것입니다. 바울의 팔과 시위대원의 팔을 함께 묶어 놓는 것이고 그 시위대원을 24시간씩 근무시키고 교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극적인 드라마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위대원들과 24시간을 함께 지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2년 동안의 시간을 계산해 보면 그렇게 그와 함께 지냈던 사람들은 꽤 많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후에 로마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들이 로마의 상류사회에 복음을 퍼뜨렸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2에 보면 <「가이사」 집 사람 몇 사람에게 문안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가이사」 집이란 황제의 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본어 성경에 보면 「황제의 집 사람들」이라고 번역되어져 있습니다. 이미 복음이 로마의 심장부에 전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채 300년이 지나지 않아 로마는 콘스탄틴 황제 때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있어서 가장 빠른 길을 바울에게 보여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유롭게 움직이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그의 소원이 가장 빠르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그를 묶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알고 난 후에 또 하나의 단어를 성경에 쓰게 됩니다. 그것은 <도리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자신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을 <도리어> 진보가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심한 고통과 고난을 받았지만 내 일생이 더욱 빛나게 되었고 아름답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가장 좋은 시나리오를 갖고 감독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기뻐하고 있습니까? 늘 평안해 하고 있습니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혹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보시면서 신세타령이나 팔자운운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그 생각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낙심과 절망에서 일어나 내 당한 일이 도리어 진보가 되었다고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은 결코 헛된 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이 실패한 것 같아 보입니까? 아닙니다. 나의 생이 혹 실패인 것 같아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이 만드시는 한 편의 드라마는 실패가 없으십니다. 옥에 갇혀있었지만 실패인 것 같았지만 아닙니다. 그 안에서 놀라운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찌무라 칸조(內村鑑上)의 기도문 중 <연말>이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나의 요구를 다 물리치시고
나의 소원을 다 파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만일 내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졌더라면
나는 거만해지고 교만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무 소용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소원이 있으십니까? 만일 그 소원대로 이루어졌더라면 여러분을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내 뜻은 다 끝난 것 같고 내 욕망은 무참히 땅에 떨어진 것 같고 분명히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를 겸손하게도 하시고 진실하게도 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도 하시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도 하시고 주 앞에 기도하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여 도리어 진보가 되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 만큼 선한 결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아름다운 우리의 삶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힘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믿음이 없어 나약하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계획들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그 계획이 우리의 삶 속에 이루기까지
하루하루 감사하며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 Total : 248 ] [ 6 / 9 ]
No. Subject File Date Hits
98  [2006년 4월 30일 주일]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1) 06-04-301070
97  [2006년 4월 23일 주일] 주께 엎드리는 자 06-04-251071
96  [2006년 4월 16일 주일] 무엇이 부활하는가? 06-04-161070
95  [2006년 4월 9일 주일] 잡히시던 밤의 만찬 06-04-091103
94  [2006년 3월 26일 주일] 하나님의 법을 잊지말라 06-03-261070
93  [2006년 3월 19일 주일] 옥합 깨뜨리기 06-03-191069
92  [2006년 3월 5일 주일] 세월을 아끼십시오 06-03-051071
91  [2006년 2월 19일 주일] 말씀대로 산 것 뿐인데 06-02-191069
90  [2006년 2월 12일 주일]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06-02-121086
89  [2006년 2월 5일 주일] 너무도 약한 존재이기에 06-02-051084
88  [2006년 1월 22일 주일] 충성된 종의 완성 06-01-221075
87  [2006년 1월 15일 주일] 우리교회의 헌금생활 06-01-151073
86  [2006년 1월 8일 주일] 2006년의 신앙은 06-01-081075
85  [2006년 1월 1일 주일] 내 나이 50이 넘었는데 06-01-011086
84  [2005년 12월 25일 주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05-12-251070
83  [2005년 12월 18일 주일]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05-12-181071
82  [2005년 12월 4일 주일] 온유한 자가 받는 축복 05-12-041076
81  [2005년 11월 20일 주일] 감사의 때 05-11-201074
80  [2005년 11월 13일 주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2) 05-11-131068
79  [2005년 10월 30일 주일] 조연의 아름다움 05-10-301071
78  [2005년 10월 16일 주일] 돌아가서 복종하라 05-10-161070
77  [2005년 10월 9일 주일] 하나님이 살아계십니까? 05-10-091074
76  [2005년 10월 2일 주일] 교회의 사명 05-10-021113
75  [2005년 9월 4일 주일] 기독교의 힘 (2)  05-09-041072
74  [2005년 8월 28일 주일] 기독교의 힘 05-08-281070
73  [2005년 8월14일 주일] 평화통일 선교의 길 05-08-101068
72  [2005년 7월31일 주일] 백부장의 믿음 05-07-281080
71  [2005년 7월 24일 주일] 본질적 신앙 현실적 신앙 05-07-241068
70  [2005년 7월 17일 주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05-07-171105
69  [2005년 7월 10일 주일] 메시야 비밀 05-07-101069
[1][2][3][4][5][6][7][8][9]

  
  

 

 

    ▲TOP  


〒162-0827 東京都新宿区若宮町24 東京教会
24 Wakamiya-cho, Shinjuku-ku, Tokyo, 162-0827, Japan
Tel: 03-3260-8891 Fax: 03-3268-6130    
(C) The Tokyo Korean Christian Church in Japan Ministrie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