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몇 주간에 걸쳐 신앙인의 바른 생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신앙의 실천의 장소가 어디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신앙의 실천의 장이 교회인가? 사회인가? 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해 주시는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저의 오래 된 경험 두 가지를 먼저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보면 돈을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지금의 동경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고 또 있어도 제 방까지 들어오기 전에 사무실에서 다 해결을 해 주지만 옛날에 日暮里에서 목회를 할 때는 교회의 위치가 日暮里 역 앞이라서 그런 사람들이 참 많이 교회에 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간판을 보고 찾아오기 때문에 대부분은 한국 사람들인데 이 한국 사람들은 통이 커서 그런지 비행기 값이 모자라니 좀 도와달라는 부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사기를 당해서 돈을 다 잃었는데 귀국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달라는 돈은 보통 만 엔입니다. 그리고는 돈을 받을 때면 꼭 한마디 합니다. 이 돈은 빌리는 것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갚겠다고 말합니다.
제가 그 곳에서 목회를 할 때 일본인은 딱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주일에 조심스럽게 교회의 문을 두드리더니만 배가고파서 그러니 돈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옛날에는 교회를 좀 다녔다고 하면서 교회를 오면 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1000엔을 주었습니다. 1000엔이면 식사를 한 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가져 갈 때 이런 저런 말들을 참 많이 합니다. 나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둥 한국 모 교회의 집사라는 둥 옛날에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는 둥 일본에서 사기를 당해 돈을 모두 잃었다는 둥 그리고는 반드시 갚겠다는 말을 하며 돈을 가져갑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지만 빌려간 돈을 갚기 위해 저를 찾아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마음 아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뒤 몇 개월이 지나 어떤 일본 사람이 교회에 있는 저를 찾아 왔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 사람은 저를 보더니 자신이 옛날에 돈을 빌려간 사람이라고 하면서 제게 1000엔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바로 그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 사람은 수도 없이 돈을 빌려갔는데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고 일본사람은 딱 한 번 돈을 주었는데 그것을 기억하고 돈을 갖고 왔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경험입니다.
많은 횟수는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삶의 중요한 시점에는 기도원이라는 곳을 갔었습니다. 중학교 때 기도원에서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기도를 하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갈 때 기도원엘 찾아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삶의 여러 가지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저는 기도원엘 갔습니다.
그런데 기도원에 올라갈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원에 장기 체류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기도원이라면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러 가는 곳 인줄 알고 있는데 그들이 기도원에 장기적으로 체류한다는 것은 기도의 응답이 장기적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인가? 하고 어린 마음에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후에 교회와 세상을 더 많이 경험 한 뒤에 제가 알게 된 것은 그들이 기도의 응답 때까지 기도원에서 머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피해 현실을 도피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아예 생활의 문제를 외면하고 기도원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위의 두 가지 경험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현실을 도피하고 문제를 외면하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기질과 심성의 차이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거짓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차라리 예수의 이름을 꺼내지만 않아도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오래 전 제가 서울에 있었을 때 일본으로부터 많은 목사님들이 한국교회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당시 안내를 맡았었는데 그 목사님들은 말로만 듣고 있었던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를 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제가 이틀간 새벽기도를 하는 곳을 안내하였습니다. 소망교회와 명성교회를 안내하였는데 그분들의 표정을 보니 과히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소망교회와 명성교회의 그 큰 예배당에 새벽시간에 나와 열심히 기도하는 수많은 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외국 목사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새벽기도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는 시간에 새벽기도에 대한 일본 목사님들의 얘기가 이어졌습니다. 한국교회의 힘을 본 것 같아 좋았다는 목사님도 계셨고 돌아가자마자 새벽기도를 해야겠다는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께서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한 말씀 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제 마음 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평소에는 다 어디에 가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 무엇이 문제입니까? 세계에서 새벽기도와 금식기도를 제일 잘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바로 한국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그 열정과 열심은 정말 대단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한국 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도 좋고 야곱과 같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도 좋지만 현실 속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잘 못 되었을 때 그래서 남에게 큰 피해를 입혔을 때 인간관계가 잘 못 되었을 때 가정의 불화가 심각해 졌을 때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삶의 중요한 길목에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기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기도가 제일 중요한 것이지만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 후에는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이라는 역사적인 가치의 장면이기도 하지만 시각을 줄여서 본다면 아브라함이라는 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들을 낳아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 몸종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의 가정은 여인들의 질투로 인해 평안하질 못했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임신을 한 것으로 인해 임신하지 못한 주인 사래를 멸시했고 멸시 받은 사래는 몸종이었던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결국 하갈은 주인의 학대에 견디지 못하고 친정으로 도망을 결심합니다. 오늘의 성경의 이 장면은 원래 이집트 사람이었던 하갈이 친정으로 도망하는 길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인 것입니다.
하갈은 사래에 비하면 약자이고 일방적으로 학대를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괴롭고 답답하여 그는 집을 뛰쳐나와 이집트로 도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그가 잘못한 것은 별로 없는 상황입니다. 그냥 아이를 낳으라 해서 낳은 것뿐입니다. 잘못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아이를 갖고는 여주인을 멸시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도망가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집트로 가는 길목에서 기다렸던 하나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16:9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이 말은 그녀가 종의 신분이기 때문에 단순히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많은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을 짧은 시간에 다 생각해 볼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의미를 하나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현실을 도피하지 말고 부딪혀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문제 안에서 현실 속에서 관련된 사람들과 함께 그 문제를 풀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일어난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삶의 문제를 세상으로 깊숙이 갖고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세상에서 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들은 문제를 푸는 방법에 있어서 현실을 외면한 채 하나님께 기도하여 풀려고 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로 형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야곱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야곱은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모습만을 보여 주지만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지만 33장에 보면 하나님과의 문제가 해결된 뒤에 형과의 문제를 스스로 푸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형에게 자신이 갖고 있었던 전 재산의 반을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도한 뒤에 알게 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만 하고는 문제를 푼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그 뒤 현실의 문제까지 풀어야 문제를 완전하게 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가르침이 그랬고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도 동일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변화산의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 중 베드로는 변화산이 좋으니 그곳에서 초막을 셋을 짓고 거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밑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간질로 고생하는 자를 고쳐 주십니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을 때 골로새 교인이었던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온 오네시모라는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당부하는데 그 서신이 바로 빌레몬서인 것입니다. 현실을 도피하지 말고 사람들이 서로 만나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상황들을 보면 이 말씀 속에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뜻은 도피하지 말고 회피하지 말고 현실 속에서 문제를 풀어 나가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현실도피가 매우 많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실에 대한 중요성을 많이 외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새벽기도에 힘을 쓰고 금식기도를 많이 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신앙인들이 왜 유독 현실의 문제에서는 그 열심히 약해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본인은 가져간 돈을 기억하고 갖다 주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꾸어간 돈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일까요? 교회에서는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여하는데 왜 교회 밖에만 나가면 신앙인의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참된 지식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불교의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불교는 1000년 이상 우리의 삶에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우리의 생활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생활문화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신도의 문화 속에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불교의 영향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불교의 세계관인데 그 세계관이 오늘날 신앙인들의 세계관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무척 복잡하여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세계관 하나를 말하자면 불교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곳이며 그에 반해서 해탈의 세계는 성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속(俗)이라 했고 해탈의 세계를 성(聖)이라 하였습니다. 불교는 이 聖과 俗을 구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성스럽게 되기 위해서는 속세를 떠나 해탈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불교의 사찰은 언제나 산 속에 지어지는 것입니다.
1000년 이상의 불교의 문화에 살아 온 우리 한국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세상을 이분법 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 세계관은 그대로 두고 믿음의 대상만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은 불교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목사님들은 교회와 세상을 아주 강하게 나누어 놓고는 이분법적으로 가르쳤던 것입니다.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으로 성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돌아가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복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문제를 풀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부둥켜안고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사업의 문제이면 사업의 장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직장의 문제이면 직장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가정의 문제이면 가정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돈의 문제이면 돈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고 인간관계의 문제이면 사람을 만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은 악한 곳도 아니고 더러운 곳도 아니며 사탄이 지배하는 곳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두려워 할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을 하나님의 정신으로 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도록 하나님의 향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창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문제 그 문제가 너무 무거워 도망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16:9
돌아가서 복종하라!
문제가 많이 쌓여 힘이 드십니까? 문제가 복잡하게 꼬여서 풀기 힘이 드십니까? 문제를 풀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기도원도 가시기 바랍니다. 금식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를 한 뒤에 다시 문제의 장소로 가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했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입니다. 문제를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그 문제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과 씨름하며 하나씩 하나씩 풀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참된 가르침인 것이고 신앙의 힘은 바로 거기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기도>
우리의 문제가 너무 무겁고 힘들 때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현실을 도피하거나 문제를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문제 안에서 문제를 풀어 나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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