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탄일입니다. 이 성탄의 날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이 여러분들 모든 가정 위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올 해도 변함없이 우리는 성탄을 맞이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며 성탄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깊은 마음을 찾고 새로운 위로와 소망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역시 지난 주간도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의 언어적 능력의 한계 때문에 많은 걱정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목사인 저의 무능력으로 인하여 교인들에게 잘 전달이 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그런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여러분들에게 바르게 전달되기를 기도하며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개입이라는 것은 방해를 의미하는 것도 간섭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우리의 삶에 개입을 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본래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풍성한 삶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다시금 그것을 찾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러 주시는 방법대로만 살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죄 가운데 허덕이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펴자마자 나옵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방법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한 것으로부터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 1장의 내용입니다. 성경의 첫 부분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혼돈스럽고 공허한 우리의 모습도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 창조의 법칙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혼돈은 카오스 이고 창조는 질서라는 의미의 코스모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되기 위해 하나님은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즉 로고스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카오스에 로고스가 들어오면 코스모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오스 - 로고스 - 코스모스 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의 능력 로고스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땅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렇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 즉 우리 마음에 오시면 우리의 삶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입니다. 복잡했던 삶 혼돈스러웠던 우리의 생활 흑암 같았던 우리의 모습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또한 그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늘 같은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창조 후부터 계속 죄악 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삶의 방법을 모두 잊어버리고 아니 때로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알면서도 외면한 채 점점 더 혼돈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가 가장 혼돈스러운 삶을 살고 있을 때 가장 많이 괴롭고 슬프고 아프고 낙심 될 때 하나님은 한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창조의 가르침을 다시금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기 예수의 탄생은 우리 인간들에게 다시금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은 바로 베들레헴 입니다. 성경은 그 곳을 베들레헴 에브라다라고 부릅니다.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지명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베들레헴을 부를 때는 항상 옛 지명인 에브라다를 같이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좀 특이한 현상입니다. 그것은 베들레헴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베들레헴의 뜻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의 지명의 뜻은 <떡집>이라는 뜻이고 옛 지명인 <에브라다>는 <풍성한 열매>라는 뜻입니다. 결국 같은 뜻입니다. 풍성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이름과 같이 풍성한 열매가 있는 땅도 아니고 떡이 있는 마을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들레헴은 유대 땅에서 가장 초라한 마을이었습니다. 가장 배고픈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베들레헴은 가장 작은 곳을 상징하는 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들레헴 에브라다> 라고 두 번 씩 부르는 것은 바로 풍성하다는 뜻의 이름과 같지 않게 더욱 초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어느 사람이 친구의 사무실 한 평짜리 아주 작은 회사를 방문하면서 「세계적인 일류 대기업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크다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작다는 것을 더 강조한 말이 될 것입니다. 베들레헴을 <베들레헴 에브라다> 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작다는 것의 강조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이 더 초라한 것은 단순히 성읍이 작기 때문이 아닙니다. 작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러운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작기 때문에 받았던 서러움이 있었습니다. 상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픔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이 구약의 룻기 입니다. 룻기 1장에 보면 나오미를 좇아 가는 며느리 룻이 나오는데 그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먹을 것이 없어서 다른 집의 떨어진 이삭을 주워 먹고 사는 그런 형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생활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니다. 그것이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남편이 일찍 죽고 두 아들도 죽고 며느리와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처량한 신세의 사람 먹을 것이 없어 다른 사람이 추수하고 남은 밭에서 다른 사람이 흘린 것을 주워 먹고 사는 삶 그것이 바로 베들레헴 사람 나오미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오미의 모습이 아닌 베들레헴의 모습을 보여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 초라한 성읍인 베들레헴 남에게 무시당하고 힘이 없어 서러운 먹을 것이 없는 땅 상처만 있고 아픔만 있는 땅 베들레헴 그 베들레헴이 더 이상 작은 성읍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무엇을 말합니까? 아무리 작은 베들레헴이라 하더라도 그 곳에 예수가 오시면 더 이상 작은 성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한다는 것인데 그러기에 베들레헴은 더 이상 작은 마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읍이 작고 무시당하고 천박하다 하더라도 그 안에 예수가 계시면 그곳은 더 이상 작은 마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무시당하거나 아픔이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오시면 우리도 베들레헴과도 같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로고스 이신 예수님이 우리가운데 오시면 우리의 모습이 베들레헴과도 같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의 모습을 오늘 성경은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평강의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미5:5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사람에게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내면의 상태로 인한 어려움이고 하나는 외형적인 어려움입니다. 내면의 불안한 마음으로 인한 어려움이 없는 것을 우리는 평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평강이란 말은 항상 외형적인 상황보다는 내면적인 상황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픔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가 있습니다. 그 아픔과 상처는 어떤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옵니다. 그 상처와 아픔이 가벼운 것이라면 일상생활을 해 나가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상처와 아픔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아픔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상처는 충격의 크기에 따라서 크고 작음이 결정되지만 충격의 크기는 자신이 그 충격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즉 남이 큰 충격을 주어서 자신이 큰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작은 충격이라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상처는 주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특성이 있습니다. <상처란 주는 사람은 없는데 받는 사람만 많다>고 말 할 정도입니다.
한 아이가 크리스마스 때 양말을 걸어 놓고 잠을 잤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는 장난 삼아 그 양말에 돌을 넣었는데 아이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돌을 보고서는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는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착한 아이라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충격입니다. 그런데 더 큰 아픔은 자기보다 착하지 않은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자기보다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착한 아이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데에 아주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 후에 이 아이는 모든 일에 자신감을 앓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아이가 됩니다. 자기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격은 극히 내성적이 되었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는 대인기피증에 걸리게 됩니다. 후에 성장하고 난 뒤에 산타 할아버지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자신감이 없는 상태로 굳어진 뒤였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도록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사는 자매가 있습니다. 결혼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 하면 어려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움을 할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칼을 들고 위협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그 자매는 그 후로부터 남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결혼에 대한 아름다운 꿈이 그에게는 없습니다. 그저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다 폭력적이고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큰 상처를 아이에게 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경험과 상처들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상처들이 있으십니까? 어떤 아픔들이 있으십니까? 그것 때문에 가족을 용서하지 못하고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분은 혹 안계십니까? 그런 분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내면적 괴로움으로 인해 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신다면 우리는 누구나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강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내신다는 것입니다.
미5:6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
평강이 우리의 내면적인 문제의 해결이라 한다면 우리를 건져내신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 닥치는 외형적인 문제의 해결을 의미합니다. 가정의 문제 부모님의 문제 부부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과 직장의 문제 돈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장래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까지..... 현실적으로 생활 중에 닥치는 수많은 문제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 같이 우리는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시면 그런 일상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건져 준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다가와도 우리는 겁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계시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12월 16일에 여러 구역장님들과 교인들의 도움으로 우리교인들의 모든 심방을 마쳤습니다. 지난 2월 3일에 시작한 심방은 물론 아직 방문하지 못한 가정도 많이 있습니다만 일단 구역을 한 번씩 돌아보았습니다. 구역을 심방하면서 우리 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가 새삼 느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보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목사인 제 마음이 아플 정도로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모든 가정에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가장 작고 힘없고 초라한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상처만 있는 땅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땅을 바꾸셨습니다. 평강이 있는 땅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땅으로 더 이상 작지 않은 땅으로 베들레헴을 바꾸신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다스리는 땅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베들레헴 이브라다 같이 우리의 삶도 바뀝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살도록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초라하다 할지라도 아무리 우리가 작다 할지라도 아무리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평강을 주십니다. 어려움을 극복하여 구원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오시면 변하게 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성탄의 날에 저는 여러분들의 삶에 새로운 창조의 변화가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심으로 인하여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이고 초라했던 삶이 변하여 평강을 얻는 삶 구원을 얻는 삶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성탄의 참 선물을 가득 안고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성탄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의 의미를 잘 알아
이 크리스마스에 받은 가장 기쁜 선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동경교회 모든 가족에게
평강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움을 모두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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