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죽으신 후 3일 만에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은 성탄절과 함께 기독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절기로 기키며 모든 신도들이 이 날의 의미를 생각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탄절을 말할 때 우리는 성탄을 상징하는 것으로 <마구간>과 <말구유>를 이야기합니다. <마구간>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상징하는 것이고 <말구유>는 우리를 먹이시기 위한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성탄을 상징하는 것이 <마구간>과 <말구유>라면 그렇다면 부활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은 바로 계란입니다. 예부터 중세 이후에 부활절에는 계란에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써서 서로 주고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계란에서 생명이 나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죽음에서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부활의 유일한 사건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로 얘기합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러분 부활의 첫 열매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활의 두 번째 세 번째 열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암시하고 있는 두 번째 세 번째 부활은 누구의 부활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부활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부활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활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은 부분에서 쓰여 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 그 이해의 폭이 각각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지난 13일 목요일 저녁 도쿄돔에서는 프로야구 巨人팀과 廣島 카프의 시합이 있었습니다. 그 시합에 巨人팀의 설발 투수로 프로 21년째인 올 해 나이 38살의 桑田 선수가 나왔는데 그 날 공을 아주 잘 던져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가 의미 있었던 것은 桑田가 600일 만에 얻은 귀중한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날인 14일 朝日신문의 스포츠면 톱기사의 제목이 이렇게 나왔습니다. <桑田 600일만의 부활!>
많은 사람들은 부활이란 단어의 의미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부활이고 어느 야구선수가 공을 잘 던지지 못하다가 잘 던지게 되어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자 무엇이 맞는 말입니까? 둘 다 맞는 말입니까? 아니면 둘 중에 하나만 맞는 말입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의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한 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이어서 부활의 열매가 되게 해 주신다는 그 말씀이 우리의 어떤 부분들을 부활하게 하시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평범한 내용일지는 모르겠으나 예수를 ale는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께서도 이 설교를 통해 부활에 대한 정리를 확실하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문제를 정리하기에 앞서 신학자의 말을 하나 인용을 하겠습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20세기의 신학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신앙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리를 해 준 신학자입니다. 그 신학자 Paul Tillich 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나 끊임없는 불안이 있는데 그 불안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죽음이 주는 불안이고 둘째는 공허함과 무의미 때문에 사람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고 그리고 셋째는 죄책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신학공부를 할 때 그 분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불안의 원인을 가장 정확하게 구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게도 그런 원인으로 불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은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런 원인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제거한다면 불안이 사라진다는 것과도 같은 뜻이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 인생의 허무함과 무의미 그리고 죄책감에서 해방되면 사람들은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Paul Tillich 는 바로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사람이 죽었다가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 桑田 선수같이 다시 운동을 잘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훨씬 더 범위가 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은 편협한 의미의 부활이 아니라 전인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포함해서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새로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죽음에서 다시 사는 것 뿐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생활하는 것이 부활의 의미인 것입니다.
폴 틸리히가 말한 인간의 불안요소에 대한 설명이 가장 이해하기 쉽다고 한다면 저는 그 말에 기초하여 부활을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제일 먼저 부활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힌두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해야 다음에 좋은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느냐 살 수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린아이들의 흑백론 같지만 아닙니다. 이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의 본향에서 하나님과 함께 행복한 삶을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든 슬픔과 불안 죽음의 두려움 까지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의 슬픔과 공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이 절망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활은 사람이 불안해하는 공허함과 무의미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불안과 공허는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같이 되어집니다. 기쁨과 의욕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이 공허하지 않습니다. 특별하게 재주는 없어도 많은 돈은 없어도 그래서 남들보다 뛰어나지는 않다 하더라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불안한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늘 의지하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들을 불러 자기의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돈이 많았던 사람도 아닙니다. 남들에게 내 세울 것이 있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들은 삶에 자신감이 있었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마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를 만난 그 어부들이 완전히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만나면 우리의 삶이 새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것은 옛날의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된 것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이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죄책감으로부터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죄책감은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죄책감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죽이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죄는 그 자국이 남아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을 다시 보게 되고 기억하게 되고 그것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은 그것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죄가 많이 있으면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 사람이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옛날의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죄의 자국이 크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 과거의 모습까지도 바꿔서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옛날 미국에 두 사람의 양 도둑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남의 양을 도둑질하다가 잡혀서 이마에 화인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시 양 도둑들에게는 이마에 양 도둑(Sheep Thief) 의 약자인 ST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이것은 평생토록 양 도둑질을 못하도록 하는 잔혹한 청교도적 형벌이었습니다. 이렇게 화인 맞은 두 사람의 양 도둑 중 한 사람은 정말 양심에도 화인을 맞아 계속하여 나쁜 짓을 하며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살아가는 도 중 전도를 받고는 예수님을 만나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한 말씀처럼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을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가 도와주고 죽은 사람의 시체를 처리해주고 슬픈 사람과는 며칠이고 머물며 위로해주고 그렇게 선행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보답하며 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행을 하게 된 것이고 그러다 보니 온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 그 사람의 선행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마을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또 만나서 실제로 그 사람의 헌신적인 삶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행인이 동네사람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 분은 참으로 존경할만한 분인데 그런데 저 분의 이마에 찍힌 ST는 무엇입니까?」
원래 이 질문은 그 마을 사람들은 절대로 하지 않던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을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훼손될까봐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마을 사람이 질문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다들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마을의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저분은 성자이기 때문에 Saint의 약자인 ST를 마을 사람들이 찍어드린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사탄은 우리의 죄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죄의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허물과 죄의 흔적까지도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단순한 얘기가 아닙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런 감사와 감격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일일이 말 할 수 없을 만큼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일본의 관서지방의 기독교 부흥을 이끌었던 기독교사회운동가 賀川豊彦(1888-1960) 을 잘 압니다. 그는 유명하고도 훌륭한 신앙인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출신은 그렇게 좋지 못했습니다. 그는 당시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賀川純一의 서자로 태어납니다. 그는 아버지의 본처의 형제들과 함께 자랐는데 늘 형제들의 놀림과 멸시를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저런 것이 왜 태어나가지고...」
賀川豊彦는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은 죄의 열매라는 것에 괴로워하면서 소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자연히 어릴 때부터 말이 없어졌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었다 하였습니다. 먹고 입는 것은 넉넉하였지만 삶의 의욕도 의미도 하나도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중학교에 다니던 12살 때 성탄이 가까운 겨울 길모퉁이에서 구세군이 나팔을 물면서 전도를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세요!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어린 賀川豊彦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서자도 사랑하십니까?」
구세군이 대답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서자도 사랑하시고 저 감옥에 있는 죄수들도 다 사랑하신단다.」
그 때 그 소리는 賀川豊彦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서자도 사랑한다는 그 말에 그 대열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는 독특한 신앙의 이력을 갖고 있는데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구세군의 전도대원이 먼저 된 사람입니다. 서자도 사랑 받는 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후에 그의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賀川純一의 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이 땅의 어느 누구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같은 깨달음에서 새로운 출발이 있게 됩니다. 그는 후에 자신과 같이 아픔을 간직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평생 살게 되었고 결국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빈민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 <생협/生協>을 만들게 됩니다. 서자의 출신이라는 아픔이 그를 오히려 위대한 사회운동가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에게는 헛된 것이 없습니다. 필요 없는 것이 없습니다. 다 아름답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 새 사람이 된다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아름답게 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요 우리들이 그 뒤를 잇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 뿐 아니라 삶의 허무함에서도 우리를 부활시키시고 죄책감 속에서 힘들어 하고 있는 우리를 부활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부활은 이렇게 범위가 넓습니다. 전인적인 부활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 예수를 믿으시고 이런 부활의 능력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꼭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우리의 삶을 늘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가 다시 부활하기를 원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물리치게 하시고
삶의 공허함과 허무함에서 해방되게 하시며
무거운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참된 부활을 맛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가운데 거하기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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